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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 경제 · 금융
NEDIA ORIGINAL · 김규태 칼럼

가로수길의 빈 유리창, 버티기로는 채울 수 없다

한때 서울에서 가장 걷고 싶은 거리로 꼽히던 가로수길이 서울 주요 상권 가운데 공실률이 가장 높은 거리가 됐다. 임대료를 지키려는 버티기는 거리 전체의 가치를 깎는다. 이제는 건물주와 상인, 행정이 숫자로 약속하는 상생이 필요하다.김규태 NEDIA 논설위원신사동 가로수길을 걸어 보면…

김규태 논설위원입력

한때 서울에서 가장 걷고 싶은 거리로 꼽히던 가로수길이 서울 주요 상권 가운데 공실률이 가장 높은 거리가 됐다. 임대료를 지키려는 버티기는 거리 전체의 가치를 깎는다. 이제는 건물주와 상인, 행정이 숫자로 약속하는 상생이 필요하다.

김규태 NEDIA 논설위원

신사동 가로수길을 걸어 보면 숫자보다 먼저 유리창이 말을 건다. 임대 문의 안내문이 붙은 1층이 몇 걸음마다 이어진다. 부동산 컨설팅사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조사에서 가로수길의 2025년 공실률은 43.9%였다. 같은 조사에서 성수는 3.4%, 명동은 4.9%였다. 거리의 점포 열 곳 가운데 네 곳 넘게 비어 있다는 뜻이다.

강남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금요일 저녁이면 발 디딜 틈 없던 거리가 한산해졌다는 현장 보도가 이어진다. 외식업 폐업률이 10년 사이 최고 수준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강남이라는 이름만으로 손님이 모이던 시대는 지났다.

서울 주요 상권 공실률 (2025년)가로수길은 성수의 약 13배가로수길43.9%한남·이태원11.2%홍대10.4%명동4.9%성수3.4%자료: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이투데이 2026년 6월 2일 보도 인용)
가로수길 공실률은 서울 주요 상권 가운데 가장 높다. 같은 조사 기준 성수·명동은 5% 미만이다.

공실의 원인은 경기만이 아니다

내수 부진을 탓하기는 쉽다. 그러나 같은 불황 속에서도 성수와 명동은 손님을 모은다. 가로수길이 유독 비어 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땅값이 크게 오른 만큼 임대료가 높게 굳었고,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형 브랜드는 하나둘 성수로 옮겨 갔다. 그 사이 거리를 특별하게 만들던 작은 가게들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난 지 오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매장만 남은 거리를 일부러 찾아올 이유는 줄어든다.

더 아픈 대목은 건물주의 버티기다. 임대료를 낮추면 건물 가치가 떨어질까 걱정해 공실을 감수한다. 한 건물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모든 건물이 같은 선택을 하면 거리 전체가 식는다. 빈 점포가 늘면 유동인구가 줄고, 유동인구가 줄면 남은 가게도 버티지 못한다. 결국 건물 가치를 지키려던 버티기가 건물 가치를 깎는다.

버티기의 악순환상생의 선순환지금의 가로수길필자의 제언임대료 유지 · 공실 장기화초기 감면 · 매출 연동 임대개성 있는 가게 이탈로컬 브랜드 · 팝업 입점거리 매력 저하 · 유동인구 감소볼거리 회복 · 방문객 증가건물 가치 하락임대료 · 건물 가치 회복
임대료를 지키려는 개별 선택이 모이면 거리 전체의 가치가 떨어진다. 고리를 끊으려면 상생 조건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상생을 숫자로 바꾸자

다행히 움직임은 시작됐다. 강남구가 가로수길 건물주협의회와 상생협약을 맺고, 건물주들은 임대료 인하와 임대조건 완화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이 출발이 선언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다음 네 가지가 뒤따라야 한다.

제언 1. 숫자로 약속하는 상생협약

강남구는 가로수길 건물주들과 지역상권 상생협약을 맺었다. 출발은 반갑지만 협약에 인하 폭도, 기간도 적혀 있지 않다. 신규 입점 첫해 임대료 몇 퍼센트 감면, 최소 몇 년 유지처럼 구체적인 숫자가 들어가야 상인이 계약서를 쓸 수 있다. 참여 건물에는 상생 건물 표식을 달고, 구는 환경개선·홍보 지원을 그 건물부터 연결하자.

제언 2. 매출과 함께 움직이는 임대료

고정 임대료를 낮추면 장부상 건물 가치가 떨어질까 두려운 것이 건물주의 속사정이다. 기본 임대료는 낮추되 매출이 오르면 일정 비율을 나누는 매출 연동형 계약은 그 두려움을 줄인다. 상권이 살아날수록 건물주 수입도 회복되는 구조라면 버틸 이유가 사라진다.

제언 3. 빈 점포를 무대로 바꾸는 단기 임대

오래 비어 있는 1층은 그 자체로 거리의 표정을 어둡게 만든다. 공실 기간에는 신진 디자이너, 로컬 브랜드, 전시와 팝업에 몇 주 단위로 내주자. 구가 중개와 행정 절차를 묶어 지원하면 건물주는 관리비를 덜고, 거리는 다시 찾아올 이유를 얻는다.

제언 4. 공실과 임대료를 정기적으로 공개

상권 진단은 르포 기사 몇 편이 아니라 데이터로 해야 한다. 구가 상권별 공실과 임대 시세를 분기마다 공개하면 건물주는 시장 수준을 알고 임대료를 정하고, 창업자는 감이 아니라 숫자로 입지를 고른다. 정보가 투명해야 협상도 빨라진다.

강남의 다음 이야기는 거리에서 시작된다

강남은 대한민국 상권의 기준점이었다. 기준점이 흔들리면 그 여파는 강남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역 상공인들이 오랫동안 말해 온 것처럼, 상권은 건물주 혼자의 자산도, 상인 혼자의 생계도 아니다. 함께 쓰는 공공의 무대다.

가로수길의 빈 유리창은 위기의 신호이면서 기회이기도 하다. 빈 점포가 많은 지금이야말로 개성 있는 가게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때다. 바로 옆 세로수길이 상대적으로 낮은 임대료로 조금씩 손님을 되찾고 있다는 사실이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 건물주는 버티기 대신 상생 조건을, 행정은 선언 대신 숫자를, 상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매장 대신 이 거리만의 이야기를 내놓을 때다. 그래야 가로수길이 다시 걷고 싶은 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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